네덜란드에서 한국 소부장의 미래를 보다! 성학경 위원장 “해답은 협력·도전·다학제입니다”
국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근본 경쟁력 강화를 위해 중소 기업·대기업·학계·현장을 잇는 역할에 앞장서 온 소부장기술융합포럼의 성학경 운영위원장이 최근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이번 방문단은 소부장 기업, 연구기관, 대학 등 총 23명이 참여한 공식 사절단으로,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과 포럼 사무국이 6개월간 준비해 마련한 일정이었다. 방문단은 대학·연구소·기업캠퍼스·계약 엔지니어링(Contract Engineering) 기업·전시회 등 네덜란드의 고난도 기술 생태계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다.
이번 기획 인터뷰는 성 위원장이 이 여정에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국 소부장 산업이 앞으로 반드시 준비해야 할 ‘다음 단계’를 조망하는 데 목적이 있다. 네덜란드는 ASML을 중심으로 정밀기계·광학·제어·메카트로닉스 기술이 유기적으로 융합된 세계 최고 수준의 하이테크 생태계를 보유한 국가다.
성 위원장은 이번 현장에서 “한국 소부장이 왜 지금 변화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협력하고, 도전하고, 다학제로 움직일 수 있다면 한국 소부장은 반드시 세계 무대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지는 그를 만나 한국 소부장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성학경 소부장기술융합포럼 운영위원장. 성 위원장은 최근 네덜란드 현장을 직접 방문해 한국 소부장 산업의 방향성을 모색했다. (사진출처: Bits&Chips)
Q. 이번 네덜란드 방문단을 이끌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네덜란드는 메카트로닉스·정밀공학·광학·제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국가이다. ASML뿐 아니라 그 주변을 구성하는 수십 개의 계약 엔지니어링(Contract Engineering) 기업, TNO(네 덜란드 응용 과학 연구소), Twente 대학 내 연구기관, Brainport 산업단지와 같은 협력 기반의 기업 캠퍼스가 높은 기술력을 만들 어내고 있다. 이번 방문은 한국 소부장 기업들이 이런 생태계를 직접 경험하며 “우리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네덜란드 대사관과 포럼 사무국이 약 6개월간 준비해 학교·연구소·기업·기업캠퍼스·전시회·컨퍼런스까지 매우 타이트한 일정으로 진행됐다.

▲ 네덜란드 Brainport 핵심 기업인 VDL Enabling Technologies Group 방문 모습(사진 위쪽)과 현지 기술·산업 생태계를 주제로 진행된 브리핑 세션(사진 아래).
Q. 네덜란드에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무엇이었나?
네덜란드 기술 생태계는 한마디로 ‘협력(Collaboration)’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구조이다. 특히 세 가지 키워드가 결정적이었다.
Together: 기업·대학·연구기관이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
Challenge: 난이도 높은 과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구조
Multi-disciplinary: 물리·광학·기계·전자·SW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조직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 경쟁 중심, 단기 성과 중심에 머물러 있다. 이번 방문을 통해 “왜 네덜란드가 ASML 같은 기업을 만들 수 있었는 가”에 대한 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Q. 네덜란드 기업들이 강조하는 ‘고객 수준’ 개념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는데?
네덜란드 기업들은 ‘현재의 고객’보다 ‘5년 뒤 고객’이 어떤 난제를 갖게 될지 먼저 고민한다. ASML을 상대하는 기업들은 당연히 높은 기술 수준을 요구받고, 단순한 설계나 카피 수준의 엔지니어 링으로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반면 한국 소부장 기업들은 아직 그렇게 높은 수준의 고객을 지속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HBM, Hybrid Bonding 등 고난도 공정이 빠르게 증가하며 한국도 드디어 고난도 고객 수준으로 진입하는 변곡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기술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뒤처질 수있는 시점이다.
Q. Contract Engineering 기업들은 어떤 점이 한국과 달랐나?
네덜란드의 Contract Engineering 기업들은 단순히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가 아니다. 고객이 해결해야 할 ‘기능(Functionality)’을 중심으로 개념설계부터 프로토타입·양산까지 함께 수행하는 기술 집약형 파트너이다. VDL-ETG, Demcon, Sioux, MI Partners 같은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기계 설계, 제어, 광학, 물리학 엔지니어들이 한 팀으로 움직이며 OEM과 ‘동반 설계(co-development)’ 를 수행한다. 한국 중소기업에 빠져 있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바로 이 초기 개념설계 단계이다. 여기를 네덜란드 기업들이 채워줄 수 있고, 이런 협력이 이루어지면 한국 기업도 빠르게 레벨업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비용은 높기 때문에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 네덜란드 Twente 대학에서 ASML의 EUV 렌즈의 코팅을 개발하는 연구실 전경 모습
Q. 산학 협력은 어떤 점이 가장 부러웠나?
Twente 대학을 방문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점은 대학이 개념설계나 핵심 레시피를 개발하고, 기업이 그걸 받아 대형화·양산 기술로 발전시키는 구조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EUV 미러 코팅 레시피를 Twente 대학이 개발하면 Zeiss는 이걸 받아 양산에 최적화시키는 식이었다. 산학 협력이 단기 과제가 아니라 기술 축적을 위한 장기 구조라는 것이 매우 인상 깊었다. 한국은 아직 산학이 단기 프로젝트 중심이고, 연구 지속성이 약해 장기적인 기술 축적이 어렵다. 고객 니즈가 높아질수록 대학·연구소와의 협력이 필수인데, 이번 방문은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Q. AI·데이터 기반 설비 개발 사례를 보며 어떤 인사이트를 얻었나?
Cordis-Suites사의 플랫폼은 기능(Functionality)을 기준으로 설계를 체계화하면, 그 구조를 기반으로 AI를 활용해 필요한 데이터 수집 항목, DB 구성, 대시보드 구현 등을 보다 빠르게 설계할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시 말해, AI가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기능 중심의 설계 구조가 AI 활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설비와 상호작용하듯 문제를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찾는 데 큰 강점이 있었다. 한국 기업들이 여전히 많은 시간을 들여 수작업으로 시스템을 구성하는 현실과 비교하면, 앞으로는 기능 중심 설계와 AI 활용이 결합된 형태로 개발 방식이 전환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 성학경 위원장은 네덜란드 모델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점은 ‘장기협력’과 ‘다학제 기반의 문제해결’이라고 강조한다. (사진출처: Bits&Chips)
Q. 한국 소부장이 네덜란드 모델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점은?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번째는 ‘장기 협력(long-term partnership)’이다. 고난도 기술은 단기 성과 중심 문화로는 만들 수 없다. 협력 기간이 길수록 노하우가 축적되고, 문제 해결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다학제 기반의 문제 해결 (Multi-disciplinary)’이다. 광학·물리·정밀기계·제어·SW가 통합돼야 하이엔드 장비를 만들 수 있다. 지금 한국에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따라서 이 기회를 살리려면 ‘네덜란드형 협력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앞으로 소부장 포럼이 네덜란드와 어떤 교류를 확대할 수있을까?
이번 방문에서 네덜란드 기술매체인 ‘Bits&Chips’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계기로 네덜란드와 한국 소부장 업계의 연결점이 더 확대되길 기대하고 있다. 또한 계약 엔지니어링·산학 협력·기초연구 교류 등 여러 방식으로 네덜란드와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할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소부장 포럼을 ‘한국판 Brainport’로 발전시키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이다.
Q. 한국형 ‘소부장 Brainport 모델’을 실제로 구축하기 위해 서는 어떤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소부장 산업도 앞으로는 단순한 ‘부품 공급자’가 아니라, 네덜란드처럼 기술 체계 전체를 함께 설계하고 실행하는 생태계로 변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한국의 양산설비 역량 + 네덜란드의 고난도 기술력이 결합될 때 매우 강력한 경쟁력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이미 2025년 2월부터 양국 기업 간의 본격 교류가 시작되면서 기업 간 협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국형 Brainport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 구조가 필요하다. 먼저 이러한 장기 협력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3년짜리 지원이 아니라, 산업·기술 사슬(SCM·R&D chain)을 아우르는 10년 단위의 지원 구조가 중요하다. 대기업은 네덜란드처럼 중소기업과 함께 ‘기술 사슬 전체’를 개발 하는 주도적 역할을 맡아야 한다. 대학·연구소는 단기 과제가 아닌 장기 기초기술 확보를 위한 연구를 유지해야 하고, 산업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해야 한다. 중소기업은 고난도 기술을 실제 구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단기 이익 중심 구조에서는 하이 엔드 기술로 올라가기가 어렵다.
한국과 네덜란드는 기술–양산–설계–연구를 모두 포함하는 장기 파트너십이 필요하다. 단순히 ‘고난도라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도 기술이기 때문에 SCM과 연구사슬까지 함께 장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네덜란드의 철학이다. 지금 한국은 전환점에 서 있다. 투자가 조금 늘어나면서 숨통이 트일 수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혁신을 멈추면 5년 뒤에는 오히려 고사할 수도 있다. 앞으로 더 하이엔드로 가기 위한 지속적 협력과 생태계적 접근이 절실한 시점이다.
Q. 향후 5년 안에 한국 소부장 산업에 닥칠 가장 큰 변화나 위협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분명한 것은 앞으로 5년이 소부장 산업의 ‘생존을 가르는 시기’가될 것이라는 점이다. HBM, 하이브리드 본딩, 정밀 메카트로닉스등 하이엔드 기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텐데, 여기에 대응하지 못하면 많은 기업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 있다. 특히 중소기업에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순간이다. 지금부터 기술의 고난도화, 기능 중심 설계체계(Functionalitybased design), 글로벌 협력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뒤처질 위험이 크다. 한국형 Brainport 구조가 자리 잡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산업 사슬 전체가 고난도로 이동하는 만큼, 한국도 5년 안에 기술적 체질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기회를 잃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금 이 단계에서 하이엔드 기술에 올라서야, 반도체등 여러 분야에서 이미 선점을 빼앗기고 있는 영역에서도 다시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지금의 전환이야말로 한국 소부장이 다른 전략 산업으로 확장하고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라는 의미다.
Q. 마지막으로, 매체를 통해 꼭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나 강조 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이번 인터뷰를 통해 꼭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는 단 하나다. 바로 “지금이 전환점이며, 협력을 기반으로 한 하이엔드 도약의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다. 한국 소부장 기업들은 최근 투자가 다소 확대되면서 숨통이 트이는 듯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혁신의 속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네덜란드와 한국의 협력은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양국의 기술·양산 역량이 결합될 때 새로운 산업적 가치가 창출될 것이다.
특히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중소기업이 있다. 중소기업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소부장 포럼도 지속적으로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한국 소부장의 미래는 개별 기업의 경쟁력을 넘어, 생태계 전체가 어떻게 협력 구조를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


